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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善)’이 회복되는 공동체

시편 133편 1절, 창세기 2장 18절

365성경통독이 시작된지도 5개월이 흘렀고, 90일통독도 꽤 지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처음 참여했던 분들 중에서 지금까지 계속 하고 계신 분들이 현저히 줄어든 것 같습니다. 하나님도 이러한 인간의 특성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경 서두에 중요한 것을 모두 때려담으셨습니다. 아무리 작심삼일을 해도 최소한 창세기 원역사는 읽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많이 읽힌 책은 창세기이고 그 중에서도 앞부분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앞부분에 가장 중요한 것을 기록해 두셨습니다.

창세기는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어떤 목적으로 창조하셨는지, 그 창조의 원리와 질서가 무엇인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될 하나님 나라가 어떤 모습인지, 바로 그 원형(原形)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특히 창세기 1~3장은 오늘날 인간 사회가 직면한 모든 문제의 뿌리를 진단하면서 동시에 주기도문이 말하는 "나라가 임하옵시며"의 그 나라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오늘은 그 회복의 비전 가운데 특별히 '인간 공동체'에 초점을 맞추어서 살펴보려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공동체의 원형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 위드교회가 꿈꾸어야 할 공동체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함께 묵상하겠습니다.

1. 선(善)한 공동체의 원형 — טוֹב(토브)
오늘 두 본문에는 공통된 히브리어 단어가 하나 등장합니다. טוֹב(토브), 즉 '좋다', '선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매일 매일의 창조를 마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는데, ‘좋았더라’는 바로 그 단어입니다. 그리고 '선악과'의 '선(善)' 역시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을 달리 표현하면, “매일 매일의 창조의 결과가 선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추론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이 그대로 반영된 세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선하다'라고 선언하셨지만, 2장에서는 일시적으로 ‘선(טוֹב)’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18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직접 읽어드리겠습니다.
וַיֹּ֙אמֶר֙ יְהוָ֣ה אֱלֹהִ֔ים לֹא־ט֛וֹב הֱי֥וֹת הָֽאָדָ֖ם לְבַדּ֑וֹ אֶֽעֱשֶׂהּ־לּ֥וֹ עֵ֖זֶר כְּנֶגְדּֽוֹ׃
이것을 개역개정역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중요한 부분을 다시 번역하면,
"사람이 혼자 존재하는 것이 선하지 않다.”입니다.
이 말은 “인간이란 공동체로 존재해야 선하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본래 공동체로 존재하도록 설계되었으며, 고립된 개인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인간의 완성된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을 홀로 두지 않으시고, 공동체의 최소 단위인 '둘'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의 존재 방식 자체가 공동체적입니다. 이것이 창조질서의 핵심적인 원리입니다.

2. 반대됨이 하나됨이 되는 역설 — עֵזֶר כְּנֶגְדּוֹ(에제르 케네그도)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공동체는 단순히 '함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두 번째 원리가 등장합니다.
우리말 성경은 이를 '돕는 배필'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훨씬 더 풍부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עֵזֶר כְּנֶגְדּוֹ(에제르 케네그도), 이것을 충실히 번역하면 ‘그와 반대되는 존재로서 돕는 자', 혹은 ‘그와 동등한(상응하는) 존재로서 돕는 자'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נֶגֶד(네게드)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반대편', '맞은편'이라는 공간적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질적으로도 특성이 반대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슷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아담과 '마주 보는', 그리하여 어떤 의미에서는 ‘서로 반대되는 특성'을 지닌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인 선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최초의 공동체는 동질(同質) 공동체가 아니라 이질(異質)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인 것이 아니라, 서로 반대되는 특성을 가진 존재들이 하나를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공동체를 형성할 때 자연스럽게 추구하는 것은 동질그룹입니다. 비슷한 연령대, 비슷한 직업군, 비슷한 취향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입니다. 그것이 더 편안하고 효율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본래 설계하신 공동체의 원형은 정반대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역설입니다. 서로 반대되는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몸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24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하나 되기 가장 어려운 사람들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 공동체의 역설적 아름다움입니다.
시편 133편 1절의 선언이 바로 이 역설을 노래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편 133:1은 구조와 내용이 창세기 2:18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창세기 2:18에 대한 화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원문의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 히브리어 원문의 순서에 따라 다시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얼마나 선한가? 그리고 얼마나 기쁜가? 형제들이 하나가 되어 거하는 것이.”
이 시편은 성전에 올라가면서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형제들이란 예배에 참여하는 예배자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서로의 배경이 다르고 지위가 다르며 개성이 다른 모든 예배자들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서 한 마음으로 예배하는 것이 너무나 선하고 기쁘다는 노래입니다.

3. 다름을 선하고 행복한 공동체로 만드는 비밀 ‘에제르(עֵזֶר)’
그렇다면 반대되는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선하고 행복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까요?
그 비밀이 바로 ‘에제르(עֵזֶר)’라는 단어에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도움’이라고 합니다. 도움은 몇 가지 상황에서 필요한 덕목입니다.
첫째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돕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주도하는 자를 옆에서 보조적으로 도움을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셋째는 동등한 관계이지만 상호보완적인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창세기 2:18에서 말하는 ‘도움’은 세 번째 경우의 도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로 반대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고 서로 동등한 관계이면서 돕는 자입니다. 그 말을 바꾸어 말하면 반대 특성을 가진 각각의 구성원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른 특성을 가진 구성원의 도움이 있을 때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최초의 인간공동체는 이렇게 형성되었습니다. 인간이 범죄함으로 본래의 창조성을 상실한 현재의 인간공동체라 하더라도 여전히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 원리에서 발견할 수 있는 첫 번째 통찰은 “우리 모두가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서로가 도움이 필요한 존재이다”라는 사실입니다. 이 통찰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공동체 안에는 인간관계의 갈등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갈등은 당사자 뿐만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전체에게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נָעִים(나임), 즉 ‘기쁨’을 파괴하는 원인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 갈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갈등의 당사자들이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데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갈등이 사라지고 기쁨(나임)이 회복되는 공동체를 ‘하나님의 나라’라고 한다면, 하나님 나라의 회복은 우리 각 사람이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데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음으로 ‘에제르’가 주는 두 번째 통찰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우리 각 사람이 연약한 지체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도움이 될 수 있고 또한 돕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선한 공동체를 이뤄가는 방법론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인간공동체는 도움(에제르)으로 서로 연결되고 얽혀있는 밀접한 공동체입니다.

4. ‘에제르 케네그도’로 형성된 식탁 공동체
오늘 우리는 셀별 혹은 통합된 셀별로 함께 식사를 하게 됩니다. 인간공동체의 원형이 바로 이 식탁공동체입니다. 이 진리를 동양에서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친밀한 공동체를 ‘식구(食口)’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그대로 풀면 ‘먹는 입’인데 실제로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를 일컫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명령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창세기 2:16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놀랍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이 우리말 개역개정과 다소 차이가 있기 때문에 히브리어 본문을 먼저 읽고 번역을 해드리겠습니다.
וַיְצַו֙ יְהוָ֣ה אֱלֹהִ֔ים עַל־הָֽאָדָ֖ם לֵאמֹ֑ר מִכֹּ֥ל עֵֽץ־הַגָּ֖ן אָכֹ֥ל תֹּאכֵֽל׃
“주(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에게 명령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그 동산의 모든 나무들로부터 (나오는) 것들을 반드시 먹어야 한다.’”
놀랍게도 인간에 대한 최초의 명령이 모든 나무에서 나오는 것을 꼭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식사와 관련된 명령이 최초의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우리의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명령입니다. 이어지는 17절의 명령은 먹지 말라는 명령인데 이 명령은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명령입니다.
신약에서는 달라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약에서 가장 중요한 신앙적 사건이 예수님의 마지막 유월절 만찬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주님은 유독 먹는 얘기를 많이 하셨고 먹는 것과 관련된 사건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과 더 친밀해지고 싶을 때 “언제 밥 한번 먹자!”라고 말을 합니다.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굉장히 다양한 함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먹는다는 것은 가장 원초적인 일입니다. 우리의 목숨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그토록 중요한 일에 시간과 공간을 함께 하는 일이 식사입니다. 그래서 함께 식사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식사 중에는 배려할 것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원초적 욕구를 충족하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것만 챙겨서는 안 됩니다. 상대방을 배려해야 합니다. 더 먹고 싶어도 상대방이 먹을 것을 고려하여 조절해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 하여 싹 다 먹어치워버리면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하면서 먹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시간은 교감신경보다는 부교감신경이 활성화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교감신경이 활성화된 상태에서 식사를 하게 되면 체합니다. 그래서 식사 자리는 가장 편하고 안정된 시간과 공간에서 하게 됩니다.
이렇게 부교감신경이 활성화되는 자리이기 때문에 우리의 고등한 사고를 담당하는 전두엽이 활성화되어 고도의 정신적 활동을 통한 대화가 가능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더욱 친밀하고 깊은 관계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친밀함과 화목을 도모하는 구약의 화목제사는 제물의 일부를 함께 먹으면서 행하도록 규정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나누게 될 식사는 구약의 화목제사와도 같은 식탁이 되어야 합니다. 아니 매번 매 주일마다 나누는 식탁이 화목제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누는 식탁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는 중요한 과정과 방법입니다.
참고로 오늘날 유대인들에게 성전이 없는 지금 상황에서 성전제사를 대신하는 시간이 바로 식사시간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손을 씻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가 제사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배 이후에 이어지는 식탁과 교제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이루는 화목제사가 되었으면 합니다.

5. 나가며 - 공동체로 하나님 앞에 서다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먼저 우리는 인간이 공동체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홀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눈에 선하지 않습니다.
둘째, 공동체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의 특성이 다를 뿐만 아니라 완전히 반대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움으로 온전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에제르’, 즉 돕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창조하신 공동체는 가장 원초적인 활동 속에서 공동체의 하나됨을 이루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시편 133편은 "성전에 올라가며 부르는 노래", 즉 예배자들의 노래입니다. 다른 지파, 다른 배경, 다른 삶의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이 한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 발걸음 속에서 이 노래가 울려 퍼졌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우리가 연합된 공동체로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이 선히 여기시고 기뻐받으시는 예배가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예배는 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반대되는 우리가 하나됨을 이루는 그 역설의 공동체 — 그것이 창조질서의 회복이며,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나라의 비전입니다.

"우리가 연합된 공동체로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이 선히 여기시고 기뻐받으시는 예배가 됩니다. 반대되는 우리가 하나됨을 이루는 그 역설의 공동체 — 그것이 창조질서의 회복이며,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나라의 비전입니다."

Life Sharing

한 주간의 삶에서 셀원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Word Reflection

오늘 본문에 대한 자신의 묵상이나 설교 내용 중에서 마음을 터치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내 안의 '에제르'

공동체 안에서 나와 기질이 다르거나 반대되는 사람과 함께할 때 겪었던 어려움이 있었나요? 나와 다름이 오히려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는 '돕는 배필'이 될 수 있음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식탁 공동체의 회복

밥을 함께 먹는 것은 단순한 식사를 넘어 교감하고 화목을 누리는 자리입니다. 우리 셀이나 가정의 식탁이 화목제사가 되기 위해 내가 실천할 수 있는 배려나 노력은 무엇입니까?

연약함을 인정하기

우리는 모두 도움이 필요한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최근에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누군가의 도움(에제르)을 경험했던 적이 있나요? 선한 공동체를 위해 내가 내려놓아야 할 완벽주의나 교만은 무엇입니까?